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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강씨ㅡ인헌공파,인헌공강감찬송덕비ㅡ은열공파, 은열공강민첨ㅡ 팔왕 선산

강병휘 2024. 5. 20. 15:26

948년고려 정종 3  문곡성이 삼한 벽상공신강궁진집에 떨어져 아들이 태어나니 그 이름을 은천, 감찬이라 하였고 훗날 송의사신이 강감찬 접견 시 ㅡ북두칠성문곡성화신체ㅡ라 증언하는지라. 983 성종 2년 36세로 갑과장원 급제하고 두루 관직을 역임하시게 된다.
거란이 발해멸망시키고  송을 멸망시킬 목적으로 고려와 3차에 걸쳐 전쟁 을  일으키는바, 993년 1차는 서희의 탁월한 외교 전술로 강동 6주 획득하고 물러가게 했고, 1010 현종 2년 2차 거란 침입 시 공이 예부시랑으로 재직했을 때항복론자들이  많았으나   개경은 함락됐을지라도 공의주장대로 현종을 나주로 몽진시켜 종묘사직을 보존시켰고, 현종의 거란 입조에 대한 거짓 약속으로 거란을물러가게 했다. 공은이부상서에 오르게 되고, 거란 3차 침입에 만반의 준비를 하여,
1018 현종 9년 경관직 내사시랑평장사  외관직서경유수를 겸하시며 3차 침입 당시엔 상원수 강감찬, 부원수 강민첨으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흥화진 전투를 필두로 하여, 개성청야전투, 귀주 대첩승리로고려거란 전쟁을 종결시키게 된다. 귀주대첩패배로 인해 거란은 다시 한번 고려를 침략할 수가 없었으니 동아시아는 약 120년간 세력 균형에 의한 평화가 유지되었다.1030현종 21년 공은문하시중 되시고
1031년 덕종원년 강감찬ㅡ문곡성! 지상세계 소임 다하고  북두칠성 문곡성에 돌아가시게 되었네!

송덕비는 대한민국전북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팔왕부 랔팔왕선산에건립되어있읍니다



진주강씨ㅡ은열공파 ㅡ은열공 ㅡ강민첨
음력 963년 11월 29일 강주(康州, 진주의 옛 이름) 개경향(開慶鄕)에서 아버지 원윤 강보능(姜甫能)과 어머니 거창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는나이 15세(978년)까지는 향교를 다녔다.
음력 1005년 4월 고려 목종 문과에 급제했다. 장사랑, 문림랑, 도교령 동정을 거쳐, 동북면의 안변도호부 장서기(掌書記)로 일했다.
제2차 여요전쟁이 끝나고 음력 1011년 3월 이후 도관((都官)의 시원외랑(試員外郎)에 제수되고 음력 8월 이후 안찰사(按察使)에 제수되었다. 1017년 태복경에 제수되었다.
은열사의 묘비에 따르면 1019년 응양상장군이 된 시점에 은청흥록대부(銀靑興祿大夫) 품계에 오르고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에 봉해져 식읍 300호를 받았다.음력 1020년 12월 17일 품계가 금자흥록대부(金紫興祿大夫)에 올랐다.
1021년 죽고 은열(殷烈)이라는 시호를 받아 진주 강씨 은열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오늘날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이티숲실길 42-18(구 감천동)에 묘소가 지어졌다. 글공부하던 경상남도 하동군의 우방산 아래 두방영당(斗芳影堂)이 세워졌다. 오늘날 경상남도 진주시의 옥봉산 아래 개경향(開慶鄕) 생가 터에 은열사(殷烈祠)가 세워졌다. 1968년 후손들이 청주 충현사를 세워 강감찬과 함께 위패를 두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서생 출신으로 활쏘기, 말타기는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강감찬, 윤관, 김부식처럼 출장입상(出將入相, 나가서는 장군, 들어와서는 재상), 유장(儒將, 학자이면서 장군)의 시대였던 고려 전기에도 새삼스레 이런 면모가 강조된 걸 보면 군대와는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여요전쟁 같은 어려운 시기를 만나 군대 지휘관으로서의 활약으로 출세했고 조선시대에도 대체로 장군의 이미지로 알려졌다.